[교양] 인간_본성에_관한_논고(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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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06-17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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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장점(長點)이 없었더라면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 난해한 철학의 제3권을 집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철학은 욕설적인 말투를 거의 용납하지 않겠지만, 바로 이런 말투 때문에 우리는 그 행동에 이성과 상반되는 점이 있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판단이 종종 거짓이거나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은 반드시 인정되어야 한다. 이와 본성은 같지만 다른 경우에 우리는 인간이 이해하는 영역에 대해 어떤 의심을 품기 쉽다.
이성은 참이나 거짓 따위를 발견하는 기능이다. 이런 장점이 없었더라면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 난해한 철학의 제3권을 집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구별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하는데, 우리는 이 물음을 통해 도덕에 관한 이 탐구를 시작하려고 한다. 이 구별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하는데, 우리는 이 물음을 통해 도덕에 관한 이 탐구를 시작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좀 떨어진 거리에서 과일을 보는데, 실제로는 맛없는 과일을 오해하여 맛있고 향긋한 것으로 상상한다.
그런데 지각은 인상(impression)과 관념(idea) 등의 두 종류로 나눠진다. 그와 같은 실수를 나의 도덕적 성격의 결함으로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즉 이런 실수는 모든 부도덕성의 원천과는 너무 거리가 멀고 대개 아주 순진무구하며, 또 그런 실수를 저지르게 된 불행한 사람에게 결코 죄를 물을 수는 없다. 더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한결같이 책 읽기를 오락으로 전도시키고, 상당한 주의력을 쏟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내팽개치는 시대에 말이다. 어떤 행동이 칭찬받거나 비난받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부적절한 수단(false measures)을 택할 수도 있고,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어떤 계획의 실행을 진척시키는 것이 아니라 후퇴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활동적(active) 원리는 비활동적(inactive) 원리에 기초를 둘 수 없다. 여기에 한 가지 실수가 있따 나는 이 과일에 다가가기 위한 방법을 택했는데, 이 방법은 내 목적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성 자체가 비활동적이라면, 이성이 자연적 주제에서 발현되든 도덕적 주제에서 발현되든 간에, 또 외부 대상의 힘을 고찰하든 이성적 존재자들의 힘을 고찰하든 간에, 이성은 자신의 모든 기색에서 비활동적인 채로 있어야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의 철학 체계는 진보하는 만큼 새로운 힘을 얻을 것이고, 또 나는 도덕에 관한 우리의 추론이 지금까지 오성(悟性; understanding)과 정념(passion)에 관해 말한 것을 모두 확인하리라는 등등의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아 도덕성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관심 있는 주제다. 사람들이 단언하는 바에 따르면, 덕은 이성과 부합되는 것일 뿐이며, 사실의 영원한 적합성과 부적합성이 있는데, 이 적합성과 부적합성은 그 사실을 고찰하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동일하고, 옳고 그름에 대한 불변의 척도는 사람뿐만 아니라 신 자신에게도 책임을 부과한다. 따라서 내가 묻고 싶은 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도덕성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관심 있는 주제다. 이성은 전적으로 무기력하고, 결코 양심이나 도덕감(a sense of morals)과 같은 활동적 원리의 원천일 수 없다. 즉 이성은 어떤 행동에 대해 부인하거나 찬성함으로써 직접 그 행동을 중단시키거나 유발할 수 없으므로, 그 행동을 중단시키거나 유발하는 影響력을 가진 것으로 밝혀진 도덕적 선악을 구별하는 원천일 수 없다. 이런 주장은 흔히 사람들이 긍정하는 학문 체계들이며, 논증적인 진리(인식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도덕성의 문제도 관념들에 의해 식별되며, 또 관념들의 나열과 비교를 통해 식별된다는 의견에서는 이 모든 체계들이 동시에 나타난다. 정신은 지각작용이라는 용어로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작용으로 발현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선악을 구별하는 판단에도 다른 모든 정신작용에 상대하여와 마찬가지로 지각작용이라는 용어가 적용될 수 있다아 어떤 성격에 찬성하고 다른 성격을 경멸하는 것은 그토록 많은 서로 다른 지각작용들일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의 철학 체계는 진보하는 만큼 새로운 힘을 얻을 것이고, 또 나는 도덕에 관한 우리의 추론이 지금까지 오성(悟性; understanding)과 정념(passion)에 관해 말한 것을 모두 확인하리라는 등등의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여기에 두 번째 실수가 있따 행동에 관한 우리의 추론에 끼어들 수 있을 법한 세 번째 실수라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다. 행동의 잘잘못은 흔히 우리의 자연적 성향과 상충되며, 우리의 자연적 성향을 억제할 때도 있따 그러나 이성에는 이런 影響력이 전혀 없다. 우리가 서재를 나서서 일상사에 뛰어들면, 그 난해한 추론의 결론은 동틀 녘의 밤도깨비마냥 자취를 감추는 듯하며, 우리는 어렵사리 얻은 이 확신조차 유지하기 힘들다. 그리고 도덕성은 언제나 실천철학에 포함되므로, 우리는 도덕성이 우리의 정념과 행동에 影響을 미치며 오성의 차분하고 정적인(indolent) 판단을 넘어서는 것으로 가정한다. 이런 주장은 흔히 사람들이 긍정하는 학문 체계들이며, 논증적인 진리(인식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도덕성의 문제도 관념들에 의해 식별되며, 또 관념들의 나열과 비교를 통해 식별된다는 意見에서는 이 모든 체계들이 동시에 나타난다. 우리는 대개 철학을 사변철학과 실천철학으로 나눈다. 이와 본성은 같지만 다른 경우에 우리는 인간이 이해하는 영역에 대해 어떤 의심을 품기 쉽다. 그런데 지각은 인상(impression)과 관념(idea) 등의 두 종류로 나눠진다. 그러므로 도덕적 구별은 이성의 산물이 아니다. 즉 어떤 의지나 행동도 이성과 직접 모순될 수 없다 하더라도 행동에 수반되는 것 중 어떤 것에서, 말하자면 그 행동의 원인이나 결과에서 이성과의 모순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참이나 거짓은 관념들 사이의 실제 관계나 관념들이 실제 존재 및 사실 등과 일치하느냐 일치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따 따라서 이와 같은 일치와 불일치의 여지가 없는 것은 무엇이든 참이나 거짓일 수 없고, 결코 우리 이성의 대상일 수도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마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미 입증했듯이 이성 혼자서는 그와 같은 影響력을 전혀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참과 거짓이 어느 정도 도덕의 원천인지 이제부터 살펴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우리 행동에 수반될 수 있거나 또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 행동을 유발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판단은 이 두 가지뿐이다. 이성은 우리 행동과 정념에 전혀 影響을 미칠 수 없다는 점이 인정되는 한, 도덕성이 오직 이성의 연역을 통해서만 발견된다고 우기는 것은 헛일이다. 나는 지금 이 논변들 가운데 한 가지만 상기시키겠는데, 이 논변을 더욱 확정적이고 이 주제에 좀 더 걸맞도록 다듬기 위해 애쓰겠다. 이런 점은 긴 연쇄적 추론에서 더 두드러지는데, 이런 추론의 경우 우리는 첫 번째 명제의 명증성을 끝까지 유지해야 하며, 그러자면 철학이나 일상생활에서 가장 널리 인정되는 모든 공리를 무시하는 일도 흔히 일어난다. 어떤 사람이 이런 처지에 있고, 또 이 두 가지 실수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 실수가 아무리 불가피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부도덕하고 죄를 지은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까? 또는 그와 같은 실수를 모든 부도덕성의 원인으로 상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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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도덕이 행동과 감정에 影響을 미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도덕은 이성에서 유래(由來)할 수가 없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정신이 지각하는 것 이외에 어떤 것도 정신에 현전(現前; present)할 수 없으며, 우리는 보고, 듣고, 판단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생각하는 이 모든 작용을 지각작용(perception)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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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내가 믿는 바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이렇게 추정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고, 이러한 추定義(정이) 토대가 되는 경험적 원리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런 추정을 피할 도리가 없다.
인간, 본성, 논고, 흄
이미 내가 입증했듯이, 이성이 전적으로 무기력하고 어떤 행동이나 감정도 억제하거나 산출할 수 없다는 논변들을 모두 되풀이하는 건 아마도 지루할 것이다. 정신은 지각작용이라는 용어로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작용으로 발현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선악을 구별하는 판단에도 다른 모든 정신작용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지각작용이라는 용어가 적용될 수 있다. 즉 이 논변이 직접 증명하는 바는, 행동의 가치(merit)가 이성과 부합된다는 사실에서 유래(由來)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그 허물(blame)도 이성과 상반된다는 점에서 유래(由來)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덕은 어떤 행동을 불러일으키거나 억제한다. 내가 고통이나 쾌락을 산출하는 대상의 影響력을 잘못 파악하거나 나의 욕구를 충족시킬 적절한 수단을 모른다면, 다른 사람은 나를 비난하기보다는 안타깝게 여길 것이다. 이런 실수는 사실에 대한 오해일 뿐이다. 즉 우리가 덕과 부덕을 구별하고 어떤 행동을 칭찬할 만하다거나 비난할 만하다고 판정할 때, 이 근거는 인상인가 아니면 관념인가? 이 물음 때문에 우리는 산만한 담화와 열변을 모두 다 즉각 떨쳐 버리고 이 주제에 안성맞춤인 사실들에 몰두하게 된다. 우리가 일상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바로는, 인간은 흔히 자신들의 의무(감)에 지배된다된다. 그리고 우리는 일상 경험을 통해 이런 사실을 확인한다. 일반적으로 도덕가들은 지금까지 이런 오해를 범죄적인 것으로 상정하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사실에 대한 오해가 전적으로 비자발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이 결코 허상일 수 없다고 추정한다. 우리는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이 결코 허상일 수 없다고 추정한다.
모든 난해한 추론에 따르는 폐단은, 그 추론이 반대자를 납득시키는 게 아니라 침묵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 또 우리가 그 추론의 위력을 느끼려면 처음 그 추론을 고안할 때와 마찬가지로 강도 높은 연구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런 주장에 대해 판단하려면 우리는 오직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하기만 하면 된다 즉 오직 이성으로만 도덕적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가? 또 우리가 도덕적 선과 악을 구별하는 데 반드시 이성 외의 어떤 원리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도덕성이 자연적으로 인간의 정념과 행동에 어떤 影響도 미칠 수 없다면, 도덕성을 일깨우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감수하는 것은 헛일일 것이고, 또 모든 도덕가들(moralists)에게 넘쳐나는 숱한 규칙과 교훈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이다. 이 주제를 두고 지금까지 언급한 것을 회상하는 건 쉬울 것이다. 따라서 칭찬받거나 비난받는 것이 이성적이거나 비이성적인 것과 동일하지는 않다. 즉 이성은 어떤 정념에 어울리는 대상의 존재를 우리에게 일깨워줌으로써 해당 정념을 유발할 수도 있따 또는 이성은 원인과 결과의 연관을 드러냄으로써 어떤 정념을 드러낼 수단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우리가 우리와 거의 무관한 주제보다는 바로 이런 관심사에 대해 더욱 실제적이고 확고하게 사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즉 오직 이성으로만 도덕적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가? 또 우리가 도덕적 선과 악을 구별하는 데 반드시 이성 외의 어떤 원리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엄밀하고 철학적인 의미에서 이성은 오직 두 가지 방식으로 우리 행동에 影響을 미친다. 즉 우리가 덕과 부덕을 구별하고 어떤 행동을 칭찬할 만하다거나 비난할 만하다고 판정할 때, 이 근거는 인상인가 아니면 관념인가? 이 물음 때문에 우리는 산만한 담화와 열변을 모두 다 즉각 떨쳐 버리고 이 주제에 안성맞춤인 사실들에 몰두하게 된다
[교양] 인간_본성에_관한_논고(흄)
이미 살펴보았듯이 정신이 지각하는 것 이외에 어떤 것도 정신에 현전(現前; present)할 수 없으며, 우리는 보고, 듣고, 판단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생각하는 이 모든 작용을 지각작용(perception)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모든 난해한 추론에 따르는 폐단은, 그 추론이 반대자를 납득시키는 게 아니라 침묵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 또 우리가 그 추론의 위력을 느끼려면 처음 그 추론을 고안할 때와 마찬가지로 강도 높은 연구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긴 연쇄적 추론에서 더 두드러지는데, 이런 추론의 경우 우리는 첫 번째 명제의 명증성을 끝까지 유지해야 하며, 그러자면 철학이나 일상생활에서 가장 널리 인정되는 모든 공리를 무시하는 일도 흔히 일어난다. 더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한결같이 책 읽기를 오락으로 전도시키고, 상당한 주의력을 쏟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내팽개치는 시대에 말이다. 우리는 이런 거짓 판단이 이 판단과 연관된 정념과 행동에 影響을 미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수사적이고 부적절한 표현이긴 하지만) 이런 거짓 판단이 그 정념이나 행동을 비이성적인 것으로 만든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논변은 현재 우리의 목적에 비춰볼 때 이중의 장점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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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나 그 행동이 이성적(reasonable)이거나 비이성적(unreasonable)일 수는 없다. 어떤 대상이 고통이나 쾌락 따위의 감각을 산출하는 경향이 전혀 없거나 또는 상상한 것과 상반되는 감각을 산출할 때라도, 사람은 그 대상에 고통이나 쾌락이 담겨있다고 상정함으로써 정념에 휩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단언하는 바에 따르면, 덕은 이성과 부합되는 것일 뿐이며, 사실의 영원한 적합성과 부적합성이 있는데, 이 적합성과 부적합성은 그 사실을 고찰하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동일하고, 옳고 그름에 대한 불변의 척도는 사람뿐만 아니라 신 자신에게도 책임을 부과한다. 판단이 어떤 정념과 공조할 때, 이런 행동은 판단을 낳는 원인이거나, 또는 그 판단 때문에 간접적으로(obliquely)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쉽게 觀察하게 된다된다. 따라서 이런 주장에 대해 판단하려면 우리는 오직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하기만 하면 된다. 다시 말해 어떤 행동이 의롭지 못하다는 opinion(의견) 때문에 그 행동을 단념하며, 책임을 져야 한다는 opinion(의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어떤 행동을 추진하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성의 규칙은 결코 우리 이성의 산물(conclusions)이 아니다. 또 이 논변은 다음과 같은 점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바로 이 진리를 좀 더 간접적으로 입증한다. 어떤 성격에 찬성하고 다른 성격을 경멸하는 것은 그토록 많은 서로 다른 지각작용들일 뿐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성은 전혀 힘이 없다. 우리가 우리와 거의 무관한 주제보다는 바로 이런 관심사에 대해 더욱 실제적이고 확고하게 사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정념은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으로 기울거나 아니면 허상으로 기울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가 인간이 이해하는 영역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명백한 일이지만 정념과 의욕 및 행동 등에는 이와 같은 일치와 불일치의 여지가 없는데, 이런 것들은 근원적 사실이자 실재(reality)이며, 그 자체에서 완전하고 `그 밖의 다른 정념과 의욕 및 행동을 가리키는 관계를 전혀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념과 의욕 및 행동 따위는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단언될 수 없고, 이성과 상반되거나 부합할 수도 없다. 정념은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으로 기울거나 아니면 허상으로 기울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가 인간이 이해하는 영역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서재를 나서서 일상사에 뛰어들면, 그 난해한 추론의 결론은 동틀 녘의 밤도깨비마냥 자취를 감추는 듯하며, 우리는 어렵사리 얻은 이 확신조차 유지하기 힘들다. 우리는 사회평화가 도덕성에 관한 모든 결정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회평화가 도덕성에 관한 모든 결정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